📌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어떤 존재였는가?
📌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어떤 존재였는가?
💡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신의 영광을 숨긴 이유는 무엇인가?
1. 세상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던 예수 그리스도: 감추어진 신성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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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존재론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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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기 훨씬 전, 갈릴리의 먼지 쌓인 길을 걷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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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세상이 그를 알았던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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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은 극소수만이 상상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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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모습이 한 평범한 사람에게 계시되었을 때, 그는 죽은 사람처럼 땅에 엎드러질 정도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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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.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
2.1.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에게 계시된 예수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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가장 영광스럽고 충격적인 계시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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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우며 계시적인 환상으로, 예수님의 신성과 순수하고 영원한 형태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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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와 함께 걸었던 자로서, 예전에 바닷가에서 함께 식사했던 예수님이 이제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싸여 인간적인 모습이 전혀 없는 진정한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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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의 환상과 예수님의 모습 묘사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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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평범한 예배일에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강력한 음성을 듣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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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것은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라 나팔 소리 같았고, 요한이 뒤돌아본 것은 이성적인 설명을 초월하는 광경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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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일곱 촛대 사이에 발에 닿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른 '인자 같은 이'를 보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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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묘사할수록,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 앞에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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머리카락은 양털같이 희고 눈은 불꽃 같았으며, 발은 빛나는 놋쇠 같았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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입에서는 양날 선 날카로운 검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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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내용은 요한계시록 1장 13절부터 16절에 기록되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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환상의 의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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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본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,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, 즉 그가 영원 전부터 실제로 존재했던 모습의 계시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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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세상 창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선재하신 그리스도이며, 이제는 가리워짐 없이, 한계 없이, 감추어진 인간성 없이 위엄과 영광으로 계시된 모습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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생전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손길을 알았던 요한은 이제 그의 우주적 권위, 지고한 본성, 그가 곧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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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의 반응과 예수님의 위로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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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즉각적인 충격으로 요한은 "그를 볼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니"라고 기록했다 (요한계시록 1장 17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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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단순한 경외심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이었으며,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임재는 은혜의 도움 없이는 어떤 인간도 감당할 수 없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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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요한을 만지며 "두려워하지 말라.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.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"라고 말씀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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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.2. 예수님의 말씀이 드러내는 권능과 본질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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말씀의 의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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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뿐만 아니라 그가 무엇을 다스리는지를 보여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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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시간의 주님이시며, 만물의 처음과 마지막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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죽으셨으나 죽음을 이기신 분이시며, 인류의 영원한 운명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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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본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현현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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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신성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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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역사적인 인물, 스승, 또는 선지자로만 보려 하지만, 그는 여기에서 모든 신적 속성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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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장면은 상징적인 그림이나 예언적인 은유가 아니라,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에 대한 공식적인 제시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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더 이상 고난받는 종이 아니라, 영광스러운 왕이시며,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, 중보하시는 대제사장, 그리고 다스리시는 재판관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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환상의 목적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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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이 환상을 보았을 때, 그는 미래를 증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항상 존재했던 영적 현실로 옮겨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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수세기 동안 인간의 눈에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 계시되었는데, 이는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각성시키기 위함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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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. 예수님의 영광이 감추어진 이유: 사랑과 겸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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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자기 비하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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만약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라면, 왜 그는 이전에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지 않았을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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왜 세상은 그를 단순한 목수로 알았고, 하늘의 주님으로 알지 못했을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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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영원한 존재가 왜 연약한 인간의 모습 뒤에 자신을 감추었을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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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불꽃 같은 눈과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으로 영광 중에 본 그분은 인간들 사이를 거의 익명으로 걸었던 그분과 동일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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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시록의 환상과 나사렛 예수의 차이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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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환상과 나사렛에 살았던 인간 예수 사이의 차이는 깊고도 계시적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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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대조는 정체성의 변화가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에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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위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, 사랑 때문에 감추어진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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바울의 증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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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님이 "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"라고 선언하며 이 신비를 드러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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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말씀은 빌립보서 2장 7절에 기록되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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'자기를 비웠다'는 용어는 신성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라, 자신의 영광의 가시적인 표현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는 의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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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셨지만, 겉으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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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알파와 오메가, 처음과 마지막이기를 멈추지 않았고, 단지 인간 삶의 단순함 뒤에 자신의 강력한 빛을 감추었을 뿐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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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삶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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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간들 사이에 살면서 예수님은 영원성을 잃지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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갈릴리의 먼지 위를 걷는 모든 발걸음, 모든 연민의 몸짓, 인간의 고통 앞에서 흘린 모든 눈물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그 존재에 의해 행해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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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묘사했듯이, "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" (요한복음 1장 1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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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조주가 자신이 항상 누구였는지를 버리지 않고 피조물이 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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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겸손한 삶과 선지자들의 예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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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0년 동안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보이지 않는 영광, 주위를 둘러싼 천군, 후광, 경이로운 표적 없이 사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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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조용히, 순종하며, 겸손하게 자라났고, 공생애를 시작하여 설교하고, 병을 고치고, 표적을 행한 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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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사야는 수세기 전에 이미 "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"라고 예언했다 (이사야 53장 2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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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위대함은 그의 외모에 있지 않고 그의 본질에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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감추어진 권능과 사랑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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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한마디 말로 군중을 지배할 힘이 있었지만, 고발자들 앞에서 침묵하기를 선택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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천사 군단을 소집할 권위가 있었지만,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버려 두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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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계시록에서 영광 중에 본 그분은 바로 죽음을 앞두고 무릎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분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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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광을 잊은 것이 아니라, 영광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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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선택은 신성한 사랑의 가장 순수한 표현 중 하나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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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신의 위엄을 감춤으로써 예수님은 상한 자들에게 다가가고, 부정한 자들을 만지고, 죄인들과 함께 앉을 수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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만약 그가 불과 광채에 둘러싸인 왕으로 오셨다면, 누가 감히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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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종으로 오심으로써 그는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, 그 이상으로 인간과 동일시될 수 있게 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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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우리의 고통을 울고, 우리의 굶주림을 느끼고, 우리의 연약함에 직면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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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인류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, 인류를 자신 안에 짊어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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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시적으로 드러난 영광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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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럼에도 불구하고, 그의 영광의 미묘한 흔적들은 때때로 드러났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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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를 들어, 변화산에서 베드로, 야고보, 요한은 그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이 빛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(마태복음 17장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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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곳에서 잠시 동안 베일 뒤에 있던 것을 엿볼 수 있었지만, 그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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규칙은 감추는 것이었고, 그의 사명이 완수될 때까지 영광은 계속 가려져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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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섬김과 희생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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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생애 내내 인간적인 영예를 주장하지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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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히려 그는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고, 그가 베푼 가장 큰 봉사는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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붙잡히고, 채찍질당하고, 십자가에 못 박히게 자신을 내어준 이 예수님은 요한이 한낮의 해처럼 빛나는 얼굴로 본 그분과 동일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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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이 희생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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십자가는 한 인간의 끝이 아니라, 하나님의 자발적인 겸비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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왜 그가 그렇게 하셨을까? 그가 우리에게 내려오셔야만 우리를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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종의 형체를 취하셔야만 죄의 노예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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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신의 위엄을 감추셔야만 진정한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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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자기를 비우심은 상실이 아니라 내어주심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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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적인 눈으로 이 행위를 바라볼 때,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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왜냐하면 모든 능력 중 가장 큰 능력이 침묵 속에서, 동시에 영원한 모든 왕의 왕이셨던 한 인간의 단순함 속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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4. 예수님의 영원한 선재성과 삼위일체
4.1. 예수님의 기도를 통한 선재성 계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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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도를 통한 비밀의 계시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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배신당하고, 체포당하고,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친밀한 장소로 가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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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밤의 침묵 속에서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경의 가장 깊은 구절들 사이에서 거룩한 메아리로 남아있는 기도를 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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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복음 17장에는 단순한 작별의 말이 아니라, 수세기를 초월하는 신비의 계시가 담겨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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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처음으로 분명하게 인간 역사 전체에 앞서는 것, 시간 이전에 존재했던 것, 오직 그분만이 선언할 수 있는 것을 드러내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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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원한 영광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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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기도는 "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"라고 시작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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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곧바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꾸는 말씀을 덧붙이신다. "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.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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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말씀들은 상징적이지 않고, 직접적이며, 명확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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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말씀들은 영원한 선재성을 주장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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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함께 신성한 영광을 공유하고 계셨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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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기도의 본질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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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간청이 아니라 정체성의 확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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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영화롭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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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영원한 권리로서 항상 자신의 것이었던 것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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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"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원한 과거에 대한 접근을 허락하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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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은 미래에 받을 영광이 아니라, 세상 이전에 존재했던 오래된 영광이며, 그가 지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가려져 있던 영광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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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부와 성자 간의 관계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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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기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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친밀함과 절대적인 연합의 언어는 이 영광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, 삼위일체의 충만함 속에서 공유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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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, 공동 영원하신 분, 공동 동등하신 분, 하나님 아들이시며, 모든 시대 이전에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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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사야 42장 8절에서 하나님은 "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"고 선언하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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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광은 그리스도와 공유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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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한다: 예수님은 바로 야훼 자신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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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의 이해와 예수님의 선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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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말씀들을 기록한 요한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의 본질이 계시되고 있음을 이해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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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스승의 입에서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비밀을 들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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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기도는 영원으로 향하는 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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원수들에게 넘겨지기 직전의 아들은 자신의 기원이 지상에 있지 않고, 그의 사명이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, 모든 하늘 위에 있는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시작되었음을 평온하게 재확인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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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생의 정의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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게다가 예수님은 이 기도를 더욱 인상 깊게 만드는 또 다른 세부 사항을 포함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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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"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"라고 말씀하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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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신을 아는 것을 연결시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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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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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계시 밖에는 영생이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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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 신성의 중요성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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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신성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라, 그 핵심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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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단순히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아니라,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분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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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생애 내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목적에 충실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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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치유하고, 가르치고, 대면하고, 사랑했으며,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하심을 나타내고자 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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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이제 최종적인 내어주심을 앞두고, 그는 숨겨진 이 영광이 다시 나타나기를 간청하는데, 이는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 계획의 완성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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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인정받기를 바라는 인간으로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, 아버지의 영광이 자신 안에서 온전히 반영됨을 아는 아들로서 구하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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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복음 17장의 기도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,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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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원 전부터 뛰고, 헤아릴 수 없는 깊이로 아버지를 알고, 자발적으로 세상에 와서 자신의 영광을 숨기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그 마음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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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이제 희생을 앞두고 그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비밀을 드러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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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 사람이 또한 영원한 하나님이셨으며, 자신이 항상 속했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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4.2. 창조 사역에 동참한 예수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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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창조 전 존재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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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모든 것의 시작에, 땅이 형태를 갖추기 전, 하늘이 존재하기 전, 첫 별이 창공에서 빛나기 전부터 존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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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미 임재가 있었고, 음성이 있었고, 계획이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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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간 없는 이 영원 속에 예수님은 미래의 아이디어나 구속의 계획으로서가 아니라, 창조의 주체로서 활동적이고, 현재적이며, 영광으로 충만하게 존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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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이 증언하는 창조와 삼위일체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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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은 장엄한 서두에서 창조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, '태초'가 단순한 시작점이 아니라, 하나님이 연합하여 일하시는 살아있는 표현임을 보여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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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연합 속에 아들이 계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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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세기 1장 1절에는 "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"라고 기록되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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히브리어에서 '하나님'에 사용된 단어는 '엘로힘'으로, 복수형이지만 단수 동사와 함께 사용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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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 자체가 특별한 것을 나타내는데, 여러 신들이 아니라 완전한 다중성 속에서 일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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단수 이름 안에 포함된 복수성은 성경 계시의 첫 부분부터 삼위일체의 존재를 미묘하게 드러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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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조 사역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활동하고 계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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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복음과 골로새서의 증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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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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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지은 것이 없느니라" (요한복음 1장 1절부터 3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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'말씀'은 그리스도이시며, 요한은 신학적 대담함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다고 단언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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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조는 예수님이 단순히 관찰자에 불과했던 사건이 아니었다. 그는 저자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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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상은 그의 말씀으로 형성되었고 그의 능력으로 유지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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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 동일한 이해를 확증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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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" (골로새서 1장 16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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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우주의 어떤 차원도, 어떤 영적 또는 물질적 피조물도 예수님의 직접적인 행위 없이 존재하게 된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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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며, 다음 구절이 확증하듯이, "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.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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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육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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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성육신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꾼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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구유에 누워 포대기에 싸인 그 아기는 모든 별을 제자리에 두었던 그분과 동일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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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물가에서 물을 구했던 그분은 땅과 물을 나누었던 그분과 동일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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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던 그분은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부르셨던 그분과 동일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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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계시록에서 본 영광과 예수님이 기도 중에 아버지께 구했던 영광은 이미 창조의 시작에 존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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잠언의 증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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잠언 8장에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있는데, 많은 신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시적인 언급으로 해석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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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2절부터 30절에는 "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, 태초부터,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그가 하늘을 예비하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"라고 기록되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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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처음부터 말씀하시는 음성은 아버지 곁에 항상 계셨던 임재, 만물의 형성에 참여하고 관찰하는 지혜를 드러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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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영원 전부터 활동하신 아들의 영원성을 보여주는 초상화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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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권위와 목적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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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신학적 진리는 단순한 교리적 호기심이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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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모든 창조물에 대한 예수님의 가치와 권위를 정의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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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태초에 계셨다면,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의 주권 아래에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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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시간보다 앞서 계셨다면, 시간의 제약에 종속되지 않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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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창조의 주체라면, 그는 또한 역사의 주님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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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다면, 구속은 대체 계획이 아니라 영원한 목적의 연속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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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육신의 깊은 의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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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육신에서 일어난 일의 위대함은 오신 분이 누구인지를 이해할 때 더욱 깊어진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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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단순히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, 창조주 자신이 창조물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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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림을 그린 예술가가 캔버스 안으로 들어오고, 건축가가 집에 거주하며, 영원하신 하나님이 완전하게 만드신 것을 회복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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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의식은 새로운 차원의 경외심을 가져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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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,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얽혀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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태초부터 그는 살아있는 말씀이요,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, 아버지의 본질의 정확한 표현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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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영광 중에 본 그분은 태초에 "빛이 있으라"고 말씀하셨던 그분과 동일하며, 빛이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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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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5.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: 기독교 신앙의 핵심
5.1. 예수님 신성의 증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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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명확한 선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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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적 이해와 단순한 종교를 구분하는 진리가 있다면, 그것은 이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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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단순히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고, 칭송받는 선지자도 아니었으며, 심지어 우월한 권위를 가진 피조물도 아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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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바로 하나님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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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주장은 비유적이거나 시적인 것이 아니라, 문자적이며, 그 이상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추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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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이 없다면, 모든 복음은 그 기초를 잃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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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 자신의 증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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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스도 자신은 공생애 내내 말씀과 행동으로 이 현실을 드러내셨고, 그의 본질이 신성한 접촉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, 인간의 옷을 입은 신성임을 분명히 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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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"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"고 선언하셨을 때, 그는 사상의 조화나 목적의 일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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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본질의 연합을 말씀하신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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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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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돌로 치려 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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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으로 고소했는데, 사람이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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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예수님은 철회하지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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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그 이해를 교정하지 않았고, 오히려 대담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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왜냐하면 이 정체성은 그의 사명과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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구약성경 속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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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스도는 생애 내내 히브리어 성경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이름과 속성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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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는 요한계시록에서 그가 "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"고 말씀하실 때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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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선언은 여러 순간에 나타나며 항상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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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분 이전에는 아무도 없었고, 그분 이후에도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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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분은 기원이 없고, 후계자가 없으며, 영원하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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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이것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만 속하는 특징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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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사야 42장 8절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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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.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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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이 영광을 받고 공유하는 것을 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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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시는데 예수님이 그 영광을 소유하고 계시다면, 예수님은 주님 자신 외에 다른 존재일 수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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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은 중간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영적인 방정식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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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이 자신이 말하는 존재이거나, 아니면 그의 모든 메시지가 붕괴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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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행동을 통한 증명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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칭호 외에 행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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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지만, 예수님은 용서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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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직 하나님만이 한마디로 바람을 잠잠하게 할 수 있지만, 예수님은 바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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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직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, 예수님은 그것을 받으셨고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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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모든 순간에 그는 요한이 계시록의 환상에서 완전히 증언할 것을 세상에 점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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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인간이 사실은 성육신한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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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나님의 아들의 의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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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만, 이 표현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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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 문화에서 '아들'이 된다는 것은 더 작거나 종속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,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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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상속받는데, 이는 그들이 같은 본질을 가졌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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히브리서 1장 3절에는 예수님이 "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"이라고 기록되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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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하나님의 그림자도, 반영도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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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정확한 표현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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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을 볼 때, 우리는 직접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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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시의 영원한 함의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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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계시는 영원한 함의를 갖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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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면,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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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명령은 스승의 조언이 아니라, 창조주의 명령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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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약속은 인간의 희망이 아니라, 신성한 칙령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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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라, 하나님 자신이 희생으로 자신을 바치신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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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의 부활은 고립된 기적이 아니라, 생명의 주님이 죽음을 이기신 승리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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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신성한 정체성은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인 세부 사항이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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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것은 중심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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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이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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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" (요한복음 20장 31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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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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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걸으셨는데, 낯선 이가 아니라 임마누엘,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서 걸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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5.2. 예수님의 영광이 천사들보다 위대한 이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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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영광의 독보성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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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은 성경에 묘사된 다른 어떤 하늘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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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이 영광으로 가득 찬 천사들과 살아있는 존재들의 인상적인 이미지를 제시하지만,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촛대 사이를 걷는 그분 앞에서 그가 목격한 현현에 근접하지 못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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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영광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우월한 것이었고, 반영된 것이 아니라 고유한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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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구별은 천사들이 숭고한 피조물이지만 신성한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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반면에 예수님은 위엄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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구약 예언과의 비교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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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묘사할 때 다니엘과 에스겔의 예언적 환상을 즉시 떠올리게 하는 용어를 사용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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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계시록 1장 14절과 15절에서 그는 "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은 불꽃 같고 발은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"라고 기록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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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언어는 선지자가 불타는 횃불 같은 눈, 빛나는 놋쇠 같은 팔과 발, 군중의 소리 같은 음성을 가진 존재를 본 다니엘 10장으로 직접 연결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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에스겔도 에스겔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좌 환상에서 하늘 존재들을 만났을 때 유사한 것을 묘사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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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번개처럼 움직이는 빛나는 놋쇠 같은 발과 빛나는 얼굴에 대해 말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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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이 위대한 환상들조차도 하나님에게서 파생되고 반영된 영광을 가리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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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경우, 영광은 그 자신의 본성에서 발산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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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광의 근원적 차이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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본질적인 차이는 기원에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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천사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여 섬기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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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에 그 영광을 공유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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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천사들이 받는 빛으로 빛나는 반면, 그리스도는 자신이 곧 빛으로 빛난다는 것을 의미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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히브리서 1장 3절에는 그가 "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"이라고 기록되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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천사들은 메신저로 보내지지만, 예수님은 말씀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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히브리서의 증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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히브리서의 저자는 첫 장들을 할애하여 이 우월성을 확립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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초기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천사에게도 "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"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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또한 어떤 천사에게도 "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"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(히브리서 1장 5절과 13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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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구별은 예수님을 높일 뿐만 아니라, 영적 세계와 관련하여 그의 정체성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혼란을 명확히 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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경배를 통한 영광의 확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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물리적 외모와 칭호 외에도 이 우월한 영광을 확증하는 또 다른 요소는 경배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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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계시록 5장에서 모든 하늘 존재들은 어린양 앞에 엎드려 "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"라고 찬양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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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은 요한계시록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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주저함도, 모호함도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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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의 존엄성을 인정하며, 이 존엄성은 하나님에게만 고유한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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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 영광의 속성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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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본 환상은 그리스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, 그가 모든 것 위에 계심을 분명히 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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불꽃 같은 눈은 절대적인 통찰력, 도달할 수 없는 순수성, 완벽하게 판단할 능력을 상징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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빛나는 놋쇠 같은 발은 견고함, 능력, 권위를 나타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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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은 창조의 무게, 하늘과 땅을 창조한 말씀의 권위를 담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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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무리 영광스러운 천사라도 그러한 속성으로 묘사되지 않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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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초월적인 영광은 아무리 고귀한 피조물의 영광과도 혼동될 수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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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것은 창조주의 영광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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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늘이 그분 앞에 굴복하고, 천사들이 경배하며 무릎 꿇고, 선지자들이 그분의 임재 앞에 엎드러진다면, 부인할 수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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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본 그분은 단순한 하늘의 메신저가 아니라 영원한 왕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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태초에 "빛이 있으라"고 말씀하셨던 그분과 동일하며, 때가 차매 육신이 되셨고, 이제 부활하고 승귀하여 하늘과 땅 앞에 영광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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6. 예수님의 사망과 음부의 열쇠 소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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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열쇠 선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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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임재 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을 때, 한 손이 그의 어깨를 만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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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늘을 지배하고 땅을 뒤흔들 것 같았던 그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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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" (요한계시록 1장 18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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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말씀들은 모든 지상적 한계를 초월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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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생명, 죽음, 그리고 모든 존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을 쥐고 계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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열쇠의 의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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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대 세계에서 열쇠를 가진 자는 입구의 수호자였으며, 접근을 허락하거나 거부할 유일한 권위자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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열쇠를 갖는다는 것은 합법적이고 의심할 여지 없는 권력을 갖는다는 의미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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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최근의 정복으로 이 열쇠들을 얻었다고 말씀하지 않고, 부활하신 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, 즉 생명의 끝과 그 너머의 것에 대한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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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죽음을 이겼을 뿐만 아니라, 죽음을 지배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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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망과 음부에 대한 주권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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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고 단언함으로써 예수님은 인류의 마지막 적이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위협이 아님을 선언하고 계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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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깊은 곳까지 내려가 무덤의 권세를 이기고 완전한 권위로 부활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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항상 분리와 상실을 상징했던 죽음은 이제 그리스도 자신의 관할 아래 있는 문이 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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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떤 인간도 그가 알지 못하는 한계를 넘지 못하며, 어떤 영혼도 그의 시야 밖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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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의 주님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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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고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은 또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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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에서 죽음 이후의 중간 상태, 즉 영혼의 보이지 않는 장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'음부'라는 단어는 더 이상 두려움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명령 아래 있는 영토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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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무리 사악한 피조물이라도 이런 종류의 권능을 쥐고 있지 않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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심지어 마귀도 그러한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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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은 근본적인 진리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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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탄은 지옥의 주님이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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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그곳에 던져질 패배자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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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곳을 열거나 닫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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희생을 통한 권위 획득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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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권위는 잔인한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으로 획득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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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속한 형벌을 대신 지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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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경험했지만, 승리하신 하나님으로서 부활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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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부활은 단순히 삶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, 그가 모든 영역, 즉 지상과 천상, 영원한 모든 영역을 다스리신다는 공개적인 선포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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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했듯이,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다 (빌립보서 2장 9절과 10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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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열쇠 소유가 주는 의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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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진리의 영향은 우리가 종말을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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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상에게 죽음은 종착점이지만,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주님이 감독하시는 전환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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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원한 미래에 관한 어떤 것도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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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열쇠를 가지고 있고,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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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모든 생명이 어디로 인도될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, 우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와 은혜에 기반한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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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이 열쇠를 쥐고 계신다는 이미지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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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것은 그의 영적 주권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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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이 영역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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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세상이나 다른 어떤 세상에도 그의 결정을 막을 수 있는 법정, 권력, 힘은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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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원은 그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에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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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이 권위는 단순히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,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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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음의 두려움, 지옥의 공포, 쌓인 죄책감에 갇혀 있는가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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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열쇠를 가진 그분은 또한 은혜의 문을 열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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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이 그리스도를 보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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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광스러운 분뿐만 아니라 주권자를 보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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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그의 음성을 듣고,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, 그는 자신이 아무런 존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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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모든 운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진 분 앞에 있었는데, 멀리 있는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승리하신 어린양으로서, 찾으시는 목자로서, 그리고 지금부터 영원히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그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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7. 예수님이 요한에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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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의 기존 경험과 새로운 계시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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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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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와 함께 걸었고, 그의 음성을 들었고, 마지막 만찬 때 그의 품에 기댔으며, 그의 기적을 보았고,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며,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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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스승 곁에서 경험했던 어떤 것도 밧모섬에서 그가 보게 될 것에 그를 준비시키지 못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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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곳에서 유배되어 홀로, 박해와 불확실성 속에서 요한은 감정적인 위로로서가 아니라, 그리스도의 하늘 위엄의 저항할 수 없는 현현으로서의 계시를 받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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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시의 목적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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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이 왜 그 순간에 그토록 큰 영광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선택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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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계시록은 고립된 미래의 환상이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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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것은 "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"는 분명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(요한계시록 1장 1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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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시는 단순히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, 본질적으로 한 인물에 관한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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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, 그의 권위,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려져 있지 않은 그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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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해받는 교회에 대한 메시지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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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계시는 요한에게 주어져 공유되도록 한 것으로, 영광스러운 과거의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긴급한 부름으로서 그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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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은 유배 중이었고, 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었으며,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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로마 제국은 무적처럼 보였고,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하고 소외된 소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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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두려움과 억압의 시나리오 속에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고난받는 종이나 겸손한 스승으로 나타나지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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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왕으로, 재판관으로, 역사의 절대적인 주님으로 나타나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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의도는 분명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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모든 것이 통제 불능처럼 보일 때에도 보좌는 여전히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을 교회에 보여주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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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은 한때 인간들 사이를 걸었던 그분과 동일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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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광스러운 계시는 세상이 겪고 있던 혼돈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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교회 가운데 임재하시는 예수님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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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촛대(교회를 상징) 사이를 걷는 분으로 자신을 보여주셨는데, 이는 "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"고 단언하기 위함이다 (요한계시록 1장 13절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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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멀리 있는 지도자도, 경건한 기억도 아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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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자신의 백성 가운데 계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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환상 속 세부 사항의 의미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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환상의 모든 세부 사항은 권위를 전달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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불꽃 같은 눈은 그가 모든 것을 보신다는 것을 보여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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입에서 나오는 검은 그의 말씀의 논쟁할 수 없는 능력을 드러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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별을 쥐고 있는 오른손은 그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의 보살핌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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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은 침묵할 수 없는 권위를 드러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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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시의 필요성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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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계시는 요한뿐만 아니라,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했던 모든 세대에게 필요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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황제들은 금 옷을 입고, 경배를 요구하고, 철권으로 지배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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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 복을 입고 영원한 권위의 음성으로 나타나셨는데, 힘으로 복종시키기 위함이 아니라, 최종적인 권능이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단언하기 위함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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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지상의 보좌를 찬탈할 필요가 없는데, 이미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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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스도에 대한 제한된 시야의 교정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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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계시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제한된 시야를 교정하기 위해 주어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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수년 동안 제자들조차 그를 단순히 역사적 인물, 살다가 죽어서 유산을 남긴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을 수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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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생각과 단절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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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기억이 아니라 현실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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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은 살아계신 분, 열쇠를 가지신 분, 그의 백성 사이를 걸으시는 분, 그리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분으로 자신을 제시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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목적은 경외심을 회복하고, 믿음을 되살리고, 희망을 다시 불붙이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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현대 세계를 향한 메시지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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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이 이 환상을 보았을 때, 그는 육체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, 그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즉각적인 인식 때문에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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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분은 동일한 그리스도였지만, 이제는 충만함 속에 계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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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바로 이 비전이 현대 세계가 다시 발견해야 할 비전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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문화적인 이미지나 제한된 표현이 아니라,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살아있는 계시, 주권자, 현재하시는 분, 그리고 활동하시는 분으로서의 계시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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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한에게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신 그분은 단지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라, 모든 시대에 그가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심을 모두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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8. 결론: 예수님의 신성과 우리의 삶의 방향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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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정체성 확립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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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여정 내내 우리는 시간의 장막을 넘어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을 보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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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는 영원한 영광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고, 그의 음성을 많은 물소리처럼 들었으며, 그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의 중심 인물이 아니라, 하나님 자신임을 이해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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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조 이전의 그의 선재성부터 요한계시록의 영광스러운 계시에 이르기까지,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분명하고, 확고하며, 논쟁의 여지가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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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많은 스승 중 한 분도 아니었고, 천사들 같은 하늘 존재도 아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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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영원한 말씀이요, 우주의 창조주요, 정의와 자비로 다스리시는 영광스러운 왕이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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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자신의 영광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데, 그가 곧 영광이시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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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사망과 영원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데, 모든 것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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삶에 대한 적용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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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을 고려할 때, 오직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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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이 모든 것이라면,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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답은 억지로 찾을 필요가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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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가 본 모든 것에 암시되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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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모든 창조의 중심이라면, 그는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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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영원한 왕이라면,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의 뜻 아래에 있어야 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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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가 살아있는 하나님이라면, 우리의 존재는 그와 연결될 때에만 의미를 찾을 수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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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감출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, 우리가 어떻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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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수님의 부르심과 재림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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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영광스럽고 영원한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자신을 단순히 구원자가 아니라 주님으로 인정할 마음이 있는 자들을 부르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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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의 백성 가운데서 불꽃 같은 눈으로 걸으시는데,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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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는 살아계시고, 통치하시고, 다시 오실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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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메시지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와 화해하기를 원하거나, 영원한 구원을 향한 새로운 여정의 첫발을 내딛기를 원한다면, 진심으로 믿음으로 아래에 댓글을 달아주세요: "저는 주 예수님을 제 삶의 유일하고 충분한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.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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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는 이 메시지가 더 많은 생명에 도달하도록 돕고,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시고 영원히 통치하시는 분의 계시를 보고 듣고 감동받게 할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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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랑하는 사람과 이 메시지를 공유하고, 오늘 계시된 진리가 우리가 알파와 오메가, 처음과 마지막,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가게 하기를 바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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